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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바뀌었다 -박노해-

선긋기 2021. 11. 28. 08:14

바람이 바뀌었다   -박노해-

천둥번개가 한 번 치고  
시원한 빗줄기가 내리더니  
하루아침에 바람이 바뀌었다  

풀벌레 소리가 가늘어지고  
새의 노래가 한 옥타브 높아지고  
짙푸르던 나뭇잎도 엷어지고  
바위 틈의 돌단풍이 붉어지고  

다랑논의 벼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검붉게 익어오고  
산국화가 꽃망울을 올리고  
하늘 구름이 투명해지고  

입추가 오는 아침 길에서  
가늘어진 눈빛으로 먼 그대를 바라본다
조용히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를 듣는다

무더운 열기와 무거운 공기와  
얼굴을 가리고 말들을 삼키고  
마스크 씌워져 무감하고 무디어진
내 생의 날들이여  

이제 바람이 바뀌어 불고  
맑아지고 섬세해진 나의 감각으로  
거짓과 진실을
강제와 자율을  
예리하게 식별해 가야겠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바뀌었다
하늘이 높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