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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못 들어가는 사람 -최금진-

선긋기 2018. 12. 25. 17:40
집에 못 들어가는 사람 -최금진-
초상집에 가서 젯밥이나 먹고 다녀도 세월은 가겠지
결혼식 하객 틈에 끼어 국수를 말아먹거나
일렬종대로 서서 무료급식소를 기웃거리거나
누가 풀어놓은 저수지의 고기들을 다 건져먹거나
빈 밭둑에 남아도는 배춧잎을 씹거나
미쳐서 집 나가 다신 안 돌아온 친척 아주머니처럼
해피하게 살 수 있겠지
식구들이야 나를 죽이고 싶겠지
자유가 얼마나 더러운 지폐 같은 것인지
가게에서, 월셋방에서
내 이름을 지불할 때마다 혀를 물겠지
작은 돌무더기처럼 쭈그리고 앉아 바라보는 남쪽 바다
목발을 짚고 걸어가는 시뻘건 태양이 손을 잡아끌면
나는 또 신기한 듯, 두려운 듯, 수평선을 넘어가겠지
지구는 둥글어서 자꾸 걸어 나가면
언젠가는 결국 제자리로 오게 될까 두려워, 나는
어쩌면 뻥 뚫린 무한의 하늘로 날아오를지도 몰라
그러나 다음 생에선 당신들이 나를 밟고 다녔으면 좋겠다
어떤 사람은 집에 못 들어간다
제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따라
일생 헤매는 사람도 있다
용서해주지 않아도 좋다, 인생은 짧고 공허는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