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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사람 -최금진-
선긋기
2018. 12. 25. 17:52
착한 사람 -최금진-
나는 착한 사람,
앞으로도 목적 없이 살아갈 것이다
당신이 말하는 종착점 같은 것은 없다
도피 중인 사람들은 나를 대하기 어렵다고 할 것이고
권위적인 사람들은 내가 의자로 보일 것이다
대화와 소통은 미개한 짓
나를 도구로 사용한 흔적이
당신의 손에 돌도끼처럼 들려져 있지 않은가
한때 시간을 주머니에 넣어서 다닌 적도 있었지만
누구를 해치려는 게 아니었다
몰래 버리기 위해서였다
투표도 하지 않을 것이다
담배도 피지 않을 것이다
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들을 흉보고, 욕하고, 비난하면서
변명과 복수들을 차곡차곡 지폐처럼 모아 배를 한 척 사고
진화의 역방향 쪽으로 배를 몰고 가겠다
주말엔 텔레비전을 보고
될수록 잠을 많이 자고
제발 나를 내버려두라고 그런 요구조차 안하고
이불 속에서, 늙은 쥐처럼
눈 오는 창밖을 멀뚱히 훔쳐보고
책도 한 줄 읽지 않고, 무식하게, 형편없게, 무기력하게
학술회에서, 강연회에서, 술자리에서 몰래 빠져나온 사람처럼
늙어 갈 것이다
어떤 참회도 하지 않을 것이다
날 사랑한다면 나를 죽여야 할 것이다
도둑질도 하지 않을 것이고 카드빚도 갚지 않을 것이다
미친놈, 샌님, 또라이, 비관주의자, 암사내, 집짐승, 퇴보, 퇴보
나는 당신들이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모른 체 눈을 감고 있을 테니까
나는 끝내 당신들의 살의를 발설하지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