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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겨울 나무 -박노해-
선긋기
2019. 1. 1. 09:51
그해 겨울 나무 -박노해-
-1-
- 그해 겨울은 창백했다
- 사람들은 위기의 어깨를 졸이고
- 혹은 죽음을 앓기도 하고
- 온몸 흔들며 아니라고도 하고 다시는 이제 다시는
- 그 푸른 꿈은 돌아외 않는다고도 했다
- 세계를 뒤흔들며 모스크바에서 몰아친 삭풍은
- 순식간에 떠나보냈다
- 잿빛 하늘에선 까마귀떼가 체포조처럼 낙하하고
- 지친 육신에 가차없는 포승줄이 감기었다
- 그해 겨울,
- 나의 시작은 나의 패배였다
- -2-
- 후회는 없었다 가면 갈수록 부끄러움뿐
- 다 떨궈주고 모두 발가벗은 채
- 빛남도 수치도 아닌 몰골 그대로
- 칼바람 앞에 세워져 있었다
- 언 땅에 눈이 내렸다
- 숨막히게 쌓이는 눈송이마저
- 남은 가지를 따닥따닥 분지르고
- 악다문 비명이 하얗게 골짜기를 울렸다
- 아무 말도 아무 말도 필요없었다
- 절대적이던 것은 무너져 내렸고
- 그것은 정해진 추락이었다
- 몸뚱이만 깃대로 서서
- 처절한 눈동자로 자신을 직시하며
- 낡은 건 떨치고 산 것을 보듬어 살리고 있었다
- 땅은 그대로 모순투성이 땅
- 뿌리는 강인한 목숨으로 변함없는 뿌리일 뿐
- 여전한 것은 춥고 서러운 사람들, 아
- 산다는 것은 살아 움직이며 빛살 틔우는 투쟁이었다
- -3-
- 이 겨울이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말할 수 없었다
- 죽음 같은 자기 비판을 앓고 난 수척한 얼굴들은
- 아무데도 아무데도 의지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 마디를 굵히며 나이테를 늘리며
- 뿌리는 빨갛게 언 손을 세워 들고
- 촉촉한 빛을 스스로 맹글며 키우고 있었다
- 오직 핏속으로 뼛속으로 차오르는 푸르름만이
- 그 겨울의 신념이었다
- 한점 욕망의 벌레가 내려와
- 허리 묶은 동아줄에 기어들고
- 마침내 겨울나무는 애착의 띠를 뜯어 쿨럭이며 불태웠다
- 살점 에이는 밤바람이 몰아쳤고 그 겨울 내내
- 뼈아픈 침묵이 내면의 종울림으로 맥놀이쳐갔다
- 모두들 말이 없었지만 이 긴 침묵이
- 새로운 탄생의 첫발임을 굳게 믿고 있었다
- 그해 겨울,
- 나의 패배는 참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