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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남지를 떠나가는 연잎 행렬을 거슬러 걸으며 -김형수-
선긋기
2019. 1. 20. 23:42
궁남지를 떠나가는 연잎 행렬을 거슬러 걸으며 -김형수-
바람 불자 마구 뛰기 시작한다
나뭇가지들, 마른 풀잎들, 말라비틀어진 쭉정이들
우주의 외진 모퉁이를 울리는 발소리...
저 많은 중생이 이승을 빠져나가는 통로가 어디인지 나는 모른다
연잎들도 이번이 처음이 아니련만
길 잃고 부서져 우는 것들도 있다
전쟁터를 빠져나가는 피란민처럼 다급한
여름 제국의 퇴각로를 걸으며 나는
불쑥불쑥 무서워지곤 한다
모든 흥망성쇠란 시골 국밥집 같은 것이다
의자왕도 생의 마지막 날에 여길 다녀갔을 것이다
인가가 끊긴 개울 앞을 건너는
나의 옷깃을 길 잃은 바람이 흔들고 간다
귀가 먹먹하다 그 뒤로 또 바람이 오고
그 뒤로 마구 잎들이 쓸려가고
버드나무들도 일제히 머리를 풀어헤쳐 떠나는 자들을 경배한다
수명이 다 됐으니 어서 엉덩이를 털고 서야
겨울이, 봄이 들어설 자리가 생기지
이딴 생각이나 하다가 정신을 까무룩 놓치곤 한다
신발은 왜 자꾸 벗겨지나 몰라
도취된 자들아 너희들의 문명은 너희들의 것이니
세상에는 반드시 추문도 풍문도 무의미한 날이 온다
현직 장관도, 책을 백만 부씩이나 판 작가도
결국 저 행렬의 일원이 될 것이다
그나마 흙길이라 다행이지
한 세대가 준열히 떠나가는 소리조차
젊음이 달린 귀는 들을 수 없다
욕망에게 내리는 천형(天刑)이 끝나지 않는 가을 궁남지에서
나는 자꾸 무성한 날을 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