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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받은 시인 -문정희-
선긋기
2020. 10. 21. 06:17
초대받은 시인 -문정희-
정치가들도 시를 좀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며
군인출신 대통령이 저녁 초대를 한 날
청와대 뜰로 들어가는
신분증 번호를 대다 말고
나는 그만 돌아서버렸다
나를 시인이라고 알지 마라
나는 글 창녀니라
죄 없는 아이들에게 소리 지르며
값싼 원고에 매달려 중노동으로 살아왔지만
그 순간 문득 시인이 되고 싶었다
백악관 저녁 초대를 갔다 오면
뜰에 기르는 거위 2백 마리가 저녁을 굶을까봐
가벼이 거절했던 북부 뉴욕의 한 작가처럼
모이를 줘야 할 거위 한 마리 내게는 없지만
대통령의 저녁 초대에 나는 못 간다고 말했다
그러나 곧 내 속에 숨은
또 하나의 얼굴이 기어 나왔다
그러고는 무슨 의연한 선비나
서툰 운동권 같은 폼을 잡는다
나 군인 대통령의 청와대 초대를 거절했노라고
은근히 그것을 선전하고
으스대고 싶어 전신이 마구 가려웠다
밤새 그 시인의 몸을
날카로운 손톱으로 긁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