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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가벗기 -마광수-좋아하는 시 2023. 1. 26. 11:51
빨가벗기 -마광수-
빨가벗고 살고 싶군. 모든 것 훨훨훨 벗어 던지고
홀가분하게 살고 싶군
자유도 싫군, 희망도 싫군, 입는 것은 다 싫군
언젠가 팔자에 없는 호텔 신세를 지게 되었을 때
무궁화가 다섯 개나 붙은 일류 호텔서 자게 되었을 때
난방장치가 너무 잘되어, 난 결국
홀딱 벗고 있을 수밖에 없었어
영하 15도가 넘는 겨울인데도 춥지가 않았어
빨가벗고도 덥기만 했어
오들오들 떨면서 지나가는 거리의 사람들이
참 재미있었어
은근히 불쌍하게 보였어
참 그렇군, 옛날 궁중에선 궁녀들에게
목욕도 못하게 했다지, 빨가벗으면 성욕이 일어난다고
평생 옷을 못 벗게 했다지
빨가벗고 목욕하는 것은
왕이 예뻐하는 여자들의 특권이었다지
그래그래, 빨가벗으면 확실히 본능이 꿈틀거려
부자연스럽지도 않아, 신비스럽게 자유로워
내 빈약한 육체조차도 대견스러워 보여 날아갈 것 같아
하지만 내 집은 너무 춥지
빨가벗고 살기엔 너무 추워
이불 속에 들어가도 추워, 북향 한옥이라 외풍이 많아
혼자서라도 빨가벗고 있고 싶어도
벗을 수가 없어, 감기 걸리기 딱 맞아
아무튼 빨가벗고 싶군, 그래서 홀가분해지고 싶군
상식도 역사도 사랑도 벗어 버리고 싶군
그러려면 집이 좋아야 해 난방장치가 최고라야 해
돈이 있어야 해
돈을 벌어야겠군 빨가벗고 살고 싶어서라도
돈을 많이 벌어야겠군
우선은 있는 옷 없는 옷 죄다 줏어 입고
평화도 윤리도 모두 줏어 입고
돈을 벌어야겠군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