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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 끊어진 연 -박노해-좋아하는 시 2020. 7. 13. 15:14
줄 끊어진 연 -박노해-
한겨울 바람이 맵찬 어느 날이었어요
창살 너머 어둑한 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줄 끊어진 가오리 연 하나가 뒤척이며 고행중이더군요
스스로를 산채로 파묻고 인연 줄도 다 놓아 버려
깊어가는 감옥이 조금은 적막하지만
한사코 붙잡지 않습니다
탓하지도, 의지하지도, 소망하지도 않습니다.
난 지금 줄 끊어진 연처럼
홀로 빈 하늘 떠도는 듯해도
하하, 나는 나대로 고독한 긴장 속에
생명줄 내건 치열한 날들입니다.
보이는 줄만 줄일까요
세 손으로 거두어야만 삶일까요
이헐게 날면 되는 것을
줄 없는 줄을 타고
허공 찬바람 속에 몸 던져주며
나는 홀로 날았습니다
처절하게 몸부림치며 내 목숨 같은 외줄을 끊고
살아 있는 모든 것과 다시 이어지는 고투의 세월을
참흑한 투쟁과 묵상의 나날이었습니다
아- 눈 맑게 열리고 마침내 내 인연의 때가 오는 날
줄 없는 줄을 통해
아직도 첫마음 밝혀든 그대에게
나 뜨거운 떨림으로 차전할 것입니다.
그래요 희망의 줄은 이미
저마다의 몸 속에 내장되어 있고
좋은 세상은 이미 현실 속에 와 자라고 있고
외줄의 때가 있고 거미줄의 때가 있고
밤새 거미 한 마리가
제 몸 속에서 투명한 줄을 뽑아
쇠창살에 잘 짜인 집을 짓더니
아침 햇살에 이른 영롱한 팽팽한 거미줄망이 그대로 한 우주,
내 삶의 안과 밖이 이어지는 관계 그물망으로 확 비추어 오더군요.'좋아하는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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