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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구두 -김광규-
복사뼈를 덮고 발목까지 올라오는 편상화.
이 밤색 구두끈을 조여 매고, 20세기가 저물 때까지 참으로 많이도 걸어 다녔다.
서울에서 부산까지는 물론이고, 동경과 대만을 거쳐 발리섬까지, 샌프란시스코와 뉴욕을 거쳐 토론토까지, 런던, 파리, 로마, 베를린을 지나서 바르샤바까지, 뮌헨, 프라하, 빈을 지나서 부다페스트까지, 동남아와 북미대륙과 유럽 각국을 누비고 다닌 것이다.
색깔이 바래고, 가죽이 터지고, 뒤축이 비뚜로 닳았지만, 발에 길들어 신기에 편하다.
그러나 볼이 꿰지고 앞창에 구멍이 뚫려서, 이제는 고쳐 신을 수도 없게 되었다.
골목을 지나가는 폐품수거차에 주어버리고 나니, 마치 맨발을 벗은 듯 허전하다.
내발처럼 익숙해진 구두를 버려야하듯, 세상이 발에 맞는 신발처럼 편안하게 느껴질 때쯤, 우리도 세상을 떠나게 마련이다.
새천년의 새해 첫 아침을 남보다 먼저 맞이하기 위하여 동쪽으로 동해바다로 앞 다투어 달려간다.
하지만 새출발을 하는 새천년에 우리는 모두 이세상을 떠나게 될 것이다.
헌구두를 버리고, 새구두를 갈아 신고,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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