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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여자 가을남자 -도종환-좋아하는 시 2020. 10. 7. 05:19
가을여자 가을남자 -도종환-
가을이 오면 가을 여자는
홀로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하고
가을 남자는
곁에 누군가가 있어주길 원한다
가을女子는 홀로 떠난 여행 길
어느 낯선 간이역 플랫폼
마지막 열차가 남기고 가는 비명 속에서
이미 전설로 남겨진
'잃어버린 여자'를 환생시키며
온전히 홀로된 고독에 묻히고 싶어 한다.
엷은 카키색 버버리 코트 깃을 세우고
어둠이 병풍처럼 둘러 처진
텅 빈 플랫폼에서
후드득 쏟아질 것 같은
별을 바라보며 흘리는 눈물도
가을여자에겐 전혀 허물없어 보인다.
때로는 孤獨한 女子가
아름다울 때도 있지 않든가
가을男子는 갓 잡아 올린
등 푸른 생선의 비늘처럼
찰랑거리며 윤기 흐르던
미루나무 광채가 사라지기 시작하면
메마른 수수깡처럼 가슴이 푸석해진다
가을여자가 '잃어버린 여자'를
환생시키고 있을 때
가을남자는 기억의 저편
신화처럼 살아있는
오월의 장미를 기억해 내며
목젖으로 올라오는 쓸쓸함을 삼킨다.
가을여자는 홀로 떠난 여행길에서
여자의 인생'을 되돌아보며
자신을 옥죄는 결박에서 벗어나
어디론가 깊숙이 숨겠노라 다짐하지만
그건, 늘 꿈꾸는 일상의 희망사항일 뿐
숨 죽였던 생명들이 소생하는 새벽이 오면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첫 차를 탄다
가을남자는 어느 후미진 골목 선술집에서
단풍 곱게 물든 어느 해 가을
산기슭에 흘렸던 장미의 눈물을 기억하며
마음의 지도를 꺼내놓고
추억을 더듬어 가지만
가냘픈 신음소리만 귓가에 맴돌 뿐
회상할수록
장미의 모습은 흐릿하게 멀어져간다.
홀로 술 마시는 가을남자는
그래서 더 쓸쓸하다
가을여자가
가을남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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