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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 난 편지를 써야겠어 -송경동-
    좋아하는 시 2022. 6. 25. 04:27

    오늘 난 편지를 써야겠어 -송경동-

    전재산 삼만원
    '쏘주'를 스무병 정도 사서
    뇌를 마비시켰다고 했다
    남은 돈은 이천칠백원
    일일이 동지들께 전화 드릴 돈이 없다고
    만원도 이만원도 좋으니
    조금씩만 부쳐주면 좋겠다는 메일이
    마지막이었다 인천의 반지하 셋방
    그는 문턱에 건 목을 길게 빼고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빈 술병들은 나부라져 우리는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발전소 정규직 노동자로 혼자 잘 사는 게
    미안하다고 그만두고 나와선
    <노동의 소리>에서 현장 영상 활동가로 살던
    닉네임 '숲속홍길동'이었다
    묘 쓸 형편이 안 돼
    마석 모란공원 납골당에 안치했다

    오랜만에 전화한다고
    감을 떼다 팔아보고 싶은데
    충북 영동에 아는 사람 있으면
    소개 좀 해달라고 했다
    만성혈전증에 하혈을 자주 해
    아기용 기저귀를 차고 노점 일을 한다고 했다
    치료비 없어 못 해 넣은 앞니 때문인지
    전화기 너머로 쉰 쇳소리가 났다
    저녁 아홉시 반까지는 하루치라도 내야
    여인숙 달방에서 쫓겨나지 않는다고
    여인숙 주인 핸드폰을 빌려
    돈을 조금만 부쳐달라는 전화가
    마지막이었다 밤 열한시 경찰이 출동해보니
    허름한 여인숙 방에 피를 쏟은 채
    마른 사내 하나가 쓰러져 있었다 혁이였다
    용산 참사 현장에서 '촛불전국연대' 운영진으로 함께 살고
    강남 성모병원 비정규직 투쟁
    KTX 비정규직 여승무원 투쟁
    비정규직 철폐 전국 자전거 행진도 함께 했던
    씩씩하던 이
    2009년 대한문 앞에 노무현 분향소를 차리고
    시민 상주 역할도 했던 이
    지금도 김이었는지 박이었는지 헷갈리는
    혁이도 마석 모란공원 납골당에 안치했다

    어느 날인가
    낯선 문자 하나가 들어와 있었다
    자신은 극단 산수유에서 연출하는 사람인데
    내 시집 제목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으로
    연극을 만들었다고 시간 되면
    꼭 보러 와달라는 것이었다
    연극이 끝난 후 그가
    자신의 오빠가 '윤활유'라고 했다
    윤활유는 2008년 광우병 촛불 항쟁 당시
    항쟁의 중심이었던 '안티MB' 카페지기였다
    항쟁 후에도 MBC 정상화 투쟁 등
    촛불 시민운동의 주요 리더로 헌신했다
    시간이 흘러 일당 칠만원을 받으며
    일요일도 없이 조경 일을 다닌다고 했었다
    바쁜데 오지 말라더니 자신은 똑바로 세우지 못하고
    간암으로 쓸쓸히 쓰러져갔다
    촛불 시민들 마음을 모아
    마석 모란공원에 간신히 봉분 하나를 만들어주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모두가
    왁자지껄 한자리에 모였던
    잔치 같던 날도 있었다
    2008년 10월 21일
    기륭전자 앞에 기습적으로 망루를 쌓고 오를 때
    숲속홍길동은 카메라를 들고 분주히 뛰어다녔고
    혁이는 건설일용노동자 출신답게 망루 위로 뛰어 올라가
    수많은 채증 카메라 앞에서 구속을 각오하고
    아시바를 받아 쌓던 단 한 사람이었고
    윤활유는 치고 들어오는 용역깡패들을 막아서다
    원투 펀치에 한 눈이 피투성이
    실명되는 부상을 입고 앰블런스에 실려 갔다
    나도 그 자리에서 표적 연행되었다가
    구속영장 기각으로 간신히 나오긴 했지만
    나는 지금껏 비겁하게 살아남았고
    오늘도 여전히 비루하게 살아가고 있다

    나도 나중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게 될까
    혹 만원이라도 이만원이라도
    부쳐줄 동지들이 남아 있을까
    감을 싸게 떼다 팔 곳을 소개해줄
    친구가 남아 있을까
    조경 일이라도 같이 할 친구가
    남아 있을까
    "언제라도 힘들고 지쳤을 땐
    내게 전화를 하라고"
    전화카드 한장을 건네줄
    동지가 남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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