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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예뻤을 때 -문정희-좋아하는 시 2020. 10. 21. 06:20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문정희-
사내들은 거수경례밖에 모르고
내 나라는 전쟁에 졌다며
당신이 패전 도시에서 재즈를 흐느끼고 있을 때
나는 식민지가 남긴 폐허에서
빈 밥그릇 속의 궁핍을 살았지
숱한 피를 흘리고도
전쟁이 잠복된 반 토막의 반도
처녀 애들은 동상 걸린 손으로 공장으로 갔고
젊은 사내들은 같은 모국어를 쓰는 적에게
총구를 겨누려고 철책 끝으로 갔지
서투른 이데올로기를 목에 걸고
베트남 정글로 갔지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입술이 종아리가 얼마나 예쁜 줄도 몰랐지
늘 가시만 무성한 엉겅퀴였지
거리에는 백수들이 조악한 낭만주의로
호시탐탐 시대를 노리고
전쟁터에서 의수를 달고 돌아온 사내들은
하늘 향해 비명처럼 고함을 내지르곤 했지
통기타에 구제품 청바지를 입고
오줌같이 쓴 생맥주를 외상으로 마시고
젊음을 토악질했지
무능과 부패가 흐물거리는 거리에서
어린 구두닦이들이 색시를 알선했지
불의와 폭력에 대한 증오로 목 터지게
자유와 정의를 외치며 돌을 던졌지
최루탄 속에 눈물을 흘리다가
미니스커트를 입고 쫓기다가
무지한 전통이 혀를 날름거리고 있는
두려운 결혼 속으로 멋모르고 뛰어들었지
전쟁보다 정교하게 여성을 파괴시킨다는
결혼 외에는 어디에도 갈 데가 업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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