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에서 길까지 -최금진-좋아하는 시 2018. 12. 25. 17:28
길에서 길까지 -최금진-
아홉 살 땐가, 재가한 엄마를 찾아 가출한 적이 있었다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거리 한복판에서 나는 오줌을 싸고 울었다
그날 이후, 나는 길치가 되기로 결심했다 ...
고등학교 땐 한 여자의 뒤를 따라다녔다
그녀가 사라진 자리에서 막차를 놓치고 대신 잭나이프와 장미 가시를 얻었다
무허가 우리 집이 헐리고, 교회 종소리가 공중에서 무너져 내리고
나는 골목마다 뻗어나간 길들을 모두 묶어 나무에 밧줄처럼 걸고
거기에 내 가느다란 목을 동여맸다
노랗게 익은 길 하나가 툭, 하고 끊어졌고 나는 어두운 소나무밭에서
어둠의 뿔 끝에 걸린 뾰족한 달을 보았다
대학을 떨어지고 나는 온몸에 이끼가 끼어 여인숙에 누워있었다
손 안에 마지막까지 쥐고 있던 길 하나를 태워 물고 있었다
미로 속에 쥐를 가두고 쥐가 어떻게 길을 찾아가는지를 연구하는 실험은
쥐들의 공포까지는 배려하지 않지만
눈 내리는 숲속의 막다른 미로에서 내가 본 것은
얼굴이 하얀 하나님과 술병을 들고 물로 걸어 들어간 우리 아버지였다
폭설과 안개가 번갈아 몰려오는 춘천
그 토끼굴 같은 자취방을 오가며
대학을 졸업하면, 나는 아이들에게 길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은백양숲에선 길을 잃어도 행복했다
은백양나무 이파리를 펴서 그 위에 빛나는 시를 쓰며
세상에서 길을 잃었거나, 스스로 길을 유폐시켰던 자들을 나는 그리워했다
길들을 함부로 곡해했고 변형시켰으며
그중 어떤 길 하나는 컵에 심은 양파처럼 길게 자라
달까지 가 닿았다, 몇 번이고 희망은 희망에 속았다
달에 들어가 잠시 눈 붙이고 난 어느 늦은 봄날
눈을 떠 보니, 나는 마흔이 넘은 사내가 되어 있었다
몇 번의 사랑도 있었으나
길에서 나누는 사랑, 그건 길짐승들이나 하는 짓거리였던 것
안녕, 길에서 나누는 인사를 나누며
내비게이션으로도 찾아갈 수 없는 절벽을 몇 번이고 눈앞에 두었었다
누군가 정해놓은 노선이 사람들을 실어 나른다, 그리고
사람들은 체포당한 것처럼 길에 결박된다
풍찬노숙의 삶을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하고 다시 막차를 놓쳤을 때
나는 알게 되었다, 더는 가고 싶은 길도, 펼쳐보고 싶은 지도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이 허무맹랑한 길로 다시 돌아오기까지 마음은 늘 고아와 객지였으니
엄마, 엄마아, 쥐새끼처럼
울고 있던 어린 나에게 따귀라도 올려부쳤어야 한 건 아니었는지
낡은 담장에 길 하나를 간신히 괴어놓고 서있던 늙은 벚나무에선
꽃들이 와르르,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길을 잃기로 작정한 사람에게 신은 더 많은 길을 잃게 하는 법
제 몫의 길을 모두 흔들어 떨어버린 늙은 벚나무는 이제 말이 없고
무덤에서 요람까지, 길에서 길까지
지상에는 길들이 흘리고 간 흙비가 종일 내리는 것이다'좋아하는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집에 못 들어가는 사람 -최금진- (0) 2018.12.25 아파트가 운다 -최금진- (0) 2018.12.25 작년 어느 날 -최승자- (0) 2018.12.25 살았능가 살았능가 -최승자- (0) 2018.12.25 춘천을 생각하며 -이승훈- (0) 2018.12.25 댓글